티스토리 뷰

이 글은 '만약'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으며, 낮지 않은 확률로 현실이 될 수 있기에 몸과 마음의 준비를 위한 독백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나에게'가 아닌 '주변에'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인 죽음은 주인공의 각성이나 복수의 계기였고,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빛바랜 감정이 되었으며, 성인이 되어서 방문한 지인의 '상갓집(喪家-)'은 위로의 한마디와 조의금을 건네는 사회생활의 장소였습니다. 친인척과 가족의 장례를 치르면서 조금씩 상실감과 복합적인 감정이 쌓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언제 떠나게 될까? 갑자기 사고로? 오랜 투병 끝에? 어느 날 중증 말기 환자라는 진단을 받는다면, 나는 어떤 감정을 가장 먼저 느끼게 될까? 단순히 죽음이 두려운 걸까, 아니면 그 전의 과정이 더 무서운 걸까? 이 글은 그런 상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옆에 계신 중증 말기 환자가 나라면, 간병을 하는 입장이 아닌 병실 침대 위에서 하루, 일주일, 한 달을 버티고 있는 것이 바로 나라면, 나는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인가? 쓸데없는 상상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싶기도 하지만, 지금 누워 계신 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그 두려움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혼자인데 언제까지 혼자인걸까

 

질병의 고통

몸이 아픈 것이 싫습니다. 팔다리 한 번 부러져 본 적이 없었는데,  몇 시간의 대수술 끝에 암덩어리는 떼었으나 그 뒤를 따르는 몇 달간의 항암치료, 치료 기간 중에 탈모, 구강염, 기력 저하, 소화 불량, 당뇨 합병증까지 겹치니 몸도 마음도 견디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수술 후 5년 이상의 치료를 통해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다시 암덩어리가 발견되었고, 나이와 몸 상태 문제로 재수술을 할 수 없는 상태로 판정받아 또다시 몇 달간의 항암치료, 탈모, 구강염 등의 반복적인 고통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코가 막혀 밤잠을 설치고 눈이 침침해서 손바닥의 작은 가시를 빼지 못해 답답한 것도 참기 힘들어하던 사람이 말기 환자에게 찾아오는 고통을 어떻게 참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일상적인 통증과는 차원이 다를 테고 약으로도 쉽게 잡히지 않는 극심한 고통,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몸의 상태에 병이 깊어질수록 통증은 일상이 되고, 그 일상은 곧 고문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큰 통증을 겪어본 적은 없습니다. 계절을 타며 가벼운 독감으로 하루, 이틀 정도 앓거나 소화 불량 정도로 약이나 먹었고, 이 순간 기억나는 가장 힘들었던 것이 사랑니 발치였던 무던한 삶이었는데 중증 말기 환자의 고통을 받아 드릴 준비가 되지 않습니다. 한 말기 간암 환자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너무 무섭다. 고통이 또 시작되니까. 차라리 영원히 눈을 감고 싶다.” 그 말이 이제는 TV 속에서 고통받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하루하루를 과연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요? 마취제와 진통제를 맞아가며 버티는 삶, 음식조차 넘기지 못해 영양제로만 이어지는 그 자체가 너무 괴롭습니다.


스스로의 상실감

질병이 깊어지고 오래되니 사람다움을 조금씩 잃어갑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침대를 떠날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불편함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존감과 존재 자체의 의미가 흔들립니다. 지금은 내 손으로 수저를 드는 정도밖에 할 수 없고,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누군가의 도움 없이 할 수 없게 된다면? 매 순간 누군가를 불러야만 하고, 혼자 있는 시간에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의 제 자신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고 있습니다. 특히 배변이나 위생 같은 기본적인 생리 현상조차 타인의 손에 의지하는 상황에 창피함과 수치심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어느 말기 루게릭 환자의 사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몸의 모든 근육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눈으로 키보드를 조작해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가 쓴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이랬습니다. “더 이상 나를 내가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 병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지금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좁아지는 것을 보면서 무력감에 빠지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단절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일 것입니다. 처음엔 걱정해 주고 찾아오던 이들도 점점 소식이 뜸해지고, 결국엔 연락조차 끊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친구들과의 대화, 가족과의 식사, 함께한 소소한 추억들이 이제는 말기 환자가 되어 외출은커녕, 침대를 벗어나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방문자도 줄어들고, 전화 통화도 힘들어지면서 그 외로움은 나날이 짙어질 것입니다. 어떤 폐암 말기 환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모두가 미안하다고 했지만,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 말은 정말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병이 깊어지면서 주변 사람들도 본의 아니게 감정적 부담을 이기지 못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반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환자를 맞이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부러라도 밝게 대해야 하고 희망을 드려야 할 것 같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점점 '잊힌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누군가가 날 찾아와 주길 바라며 기다리다 지쳐 결국 기대를 접는 그 순간, 또 한 번 혼자 남아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연락을 주어도 대답을 할 수 없는 나의 몸 상태를 한탄하면서 말이죠.


보유 자산의 탕진

지속적인 치료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 듭니다. 병원비, 약값, 간병비, 각종 검사비… 시간이 지날수록 자산은 바닥나고, 결국 가족의 삶까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지금까지 조금씩 자산을 모아 안정적인 삶을 꿈꾸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내가 떠나더라도 남은 사람에게 부담을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이 들어 모든 재산을 병원에 쏟아붓고, 치료를 위해 집을 팔고, 빚까지 생긴 이 시점에 남은 자산은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충당하였으나 앞으로의 치료비는 결국 자식들이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려 돈문제까지 떠넘겨 버린 짐이 되었습니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이래저래 부담만 주는 존재가 되어 버린 나약한 내 모습에 초라해집니다. 게다가 당장 치료비 문제로 병원을 나가야 한다면 진통제로 그나마 완화시킨 이 고통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단 말인데 나만의 고통뿐만 아니라, 내 환자의 몸이 가족 전체를 고통 속으로 끌어들이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면, 치료를 포기하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자산의 탕진은 그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남은 가족의 삶과 연결되기에 더욱 두렵습니다.


언젠가의 나에게 

말기 환자에게 가장 힘든 건,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삶은 계속되지만 방향도 목표도 사라지고, 시간은 단지 흘러가기만 합니다. 그 상태가 얼마나 갈지 모른다는 게 또 다른 고통입니다.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끝은 있으니 시간에 떠밀려지고 있습니다. 미래를 계획하여 다음 달엔 무엇을 하고, 내년엔 어떤 목표를 선정하여 나아갈지 기대반 실망반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던 과거는 이제 없습니다. 죽음은 가까이 있지만, 오늘은 아닐 수도 있는 상황. 그래서 매일 ‘오늘일까?’라는 질문을 안고 사는 것. 그 사실은 확정된 끝보다 더 큰 불안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떠나기 전 마지막 모습에 대해 아래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고통 없이, 주변에 피해 없이 조용히 떠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일주일,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은 더 길지도 않았으면 합니다. 남겨질 그들과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긴 시간 고통을 분담하지 않도록 약간의 시간만 주어지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내가 나에게 준비하는 자세를 차근차근 알려 주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요하다면 나와 같은 두려움을 가진 누군가에게 비슷한 혼란, 고통,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점을 알려 주고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라고 하고 싶습니다. 삶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몰라도 여전히 살아 있기에

끝이 다가와도 그 순간까지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갖기를 바랍니다.